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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연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후퇴와 나아갈 방향

  • 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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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4일 진행한
<굴욕외교, 검찰독재, 노동탄압,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하는 충북시국토론회>의 발제문 입니다! 
함께 읽고 고민하고자 공유합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후퇴와 나아갈 방향

조승래 (전 민교협 공동의장)

촛불 혁명의 그 환한 빛이 아직 눈앞에서 어른거리는데 캄캄한 어둠이 우리를 다시 엄습하고 있다. 윤석렬 정부의 오만과 독선이 그동안 우리 시민들이 성취한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렬 정부는 색깔론으로 다시 반공 이데올로기를 국민들 머리에 주입해 남북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적대적 관계로 돌려놓는가 하면, 각종 노동 조직들을 사회경제적 안정과 발전의 걸림돌로 타자화해 반노동의 정서를 국민들 마음에 심어주려고 혈안이 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지정학적 측면에서 반드시 견지해야 할 전략적 모호성을 내팽개치고 중국에 적대적인 한미일 군사동맹이라는 아베의 인도 태평양전략에 굴욕적으로 포섭되기를 자청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일반 국민들의 안전과 복지와는 상관없이 오직 자본과 보수 기득권층의 욕망을 채워주려는 시도임은 분명하다. 윤석렬은 이 욕망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통해 시민 공동체의 집단 지성과 일반의지로 통제되어 오던 소수 기득권층의 욕망의 족쇄를 풀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을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1. 자유라는 이름의 욕망, 윤석렬의 자유
주지하다시피 윤석렬은 대통령 취임사에서부터 공적 연설을 할 때마다 자유라는 단어를 키워드로 사용했다. 최근 국민의 공분을 산 대일 굴종 외교도 그 밑바탕에는 일본도 자유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정치, 경제, 안보의 파트너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윤석렬이 그렇게도 집착하는 자유는 바로 자본이 하고 싶은 것을 자본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유이다. 그 자유는 개인은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을 때 자유롭다는 개인주의 철학에 근거한다. 그런데 그러한 자유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역량에 비례한다. 따라서 그 자유는 평등한 자유가 아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돈이 많을수록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를 경험한 인류는 그러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님을 이미 체득했다. 내 돈 갖고 내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참견이냐는 항변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이 시민사회의 상식이 되었다. 공동체의 공동선을 구현하는 데 이바지하지 못하는 자유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닌 것이다. 그러한 자유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밀림에서 사자가 마음대로 영양을 잡아먹을 수 있는 자유이지, 이미 그 세계를 떠나 문명을 건설해 문화적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아니다. 그러한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고 그리고 그것이 인간 사회의 보편적 가치라고 우긴다면 포식자가 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실제적 예를 들어보자. 김영환 충청북도 지사는 대청호에 대한 각종 규제를 풀고 개발을 통해 레이크 파크시대를 열겠다고 한다. 까놓고 얘기하면 돈 있는 사람들이 자기 돈 가지고 대청호 옆에 호텔도 짓고 고급 식당도 열고 유람선을 운행하면서 돈 좀 벌겠다는데 왜 그 자유를 침해하느냐는 것이다. 윤석렬 대통령도 충청북도를 방문해 수행한 환경부 장관에게 규제를 풀 방안을 즉각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김지사는 시를 써서 대통령을 칭송했다. 이는 더 맑은 물을 마시며 건강한 삶을 깨끗한 환경 속에서 누리고 싶어하는 충청권 주민의 자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본의 투자와 이윤 창출의 자유만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 자본은 자유로운가? 아니다. 그저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일 뿐이다. 그 욕망의 노예는 작은 욕망의 노예들을 거느리면서 인간 사회를 인간적 가치가 꽃피는 공동체가 아니라 돈이 최고라는 자본의 논리가 도덕과 윤리로 둔갑하는 헬조선-헬세상의 마왕이 될 뿐이다.

2. 트럼프 흉내 내기, 서문시장 파퓰리즘
윤석렬은 기회 있을 때마다 파퓰리즘을 배격하겠다고 공언한다. 민주당 정권의 소극적 복지 정책마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파퓰리즘이라는 그의 인식은 철두철미 우파 파퓰리즘이다. 일찍이 미국의 레이건과 함께 신자유주의를 주창했던 영국의 총리였던 대처는 사회라는 것은 없고 오직 개인과 그 가족이 있을 뿐이라고 외쳤다. 개인이 자신의 능력껏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지 국가나 사회에 기대지 말라는 것이다. 복지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업과 자본가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해야 하는데 이는 투자를 통해 부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일자리를 줄이는 것이라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극심한 양극화를 초래했다. 그들은 모두 진보세력의 복지 정책을 대중에 아첨하는 파퓰리즘이라고 비하하면서 노조와 진보적 지식인들을 타자화했지만, 실상은 그들도 이를 통해 사회경제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불안에 떨고 있던 다수 중도층을 동원한 우파 파퓰리즘의 선봉이었다.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낮은 수준의 의료보험정책에 불과했던 오바마 케어를 폐지한 트럼프와 같은 우파 정치가들은 사회적 타자를 설정하고 그들에게 양극화의 책임을 전가하며 적개감을 불러일으키는 선동전략으로 집권했다. 트럼프의 경우 그 타자들은 국내적으로는 이민자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이었고 국제적으로는 중국이었다. 그는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고 중국과의 세계경제적 파트너쉽을 폐기했다. 그들이 미국의 중하층 시민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무시했다는 그의 저급한 언동은 평소 흑인과 이민자들을 깔보고 다문화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을 역설하던 동부와 서부의 유명 대학 출신 진보적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던 중부와 남부의 일반 대중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청량제였다.
윤석렬은 이러한 트럼프를 흉내 냄으로써 집권할 수 있었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져 나가고 있다. 촛불 혁명과 적폐청산으로 주눅이 들어있던 기득권층과 일반 보수층은 윤석렬이 보여주는 분명한 언동은, 예를 들어 후보 시절 연출했던 멸콩퍼포먼스는, ‘빨갱이를 빨갱이라 욕하지 못했던 그동안의 설음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집권 후 대북 유화 노선을 유지했던 전 정권의 안보 관계자들을 구속하고 화물연대의 파업에 강력히 대처한 결과 10%대 후반에 머물렀던 그의 지지율은 30%대로 상승했다. 그 후 민주노총을 귀족노조로 몰면서 젊은이들이 취업이 힘든 원인 중의 하나가 민주노총의 기득권 때문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들의 정당한 투쟁을 북한의 미사일만큼 위험한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진보정당과 민주노총의 일부 인사들을 북한의 지령으로 움직이는 간첩으로 구속하고 방첩을 담당하는 군부대를 방문해서는 우리 사회에 간첩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고 말했다. 윤석렬은 이러한 갈라치기 타자화를 통해 보수층의 결집을 유도하면서 쩍하면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해 환호하는 인파를 보며 힘을 얻는다고 감격한다. 이제 우리 사회는 공식적으로 빨갱이좌파 대 서문시장 멸콩인파의 대결장이 되었다. 이는 이명박근혜로 대표되는 최근의 우파 정치지도자들이 보여준 국민통합에 대한 최소한의 제스쳐마저도 폐기한 것이다.

3. 아베 추종하기, 식민지 근대화론과 인도태평양의 망상
최근 윤석렬 정부의 대일 외교정책에 대해 다수 국민들은 굴종 외교라는 낙인을 찍었다. 윤석렬은 과연 그러한 평가가 내려질 줄 몰랐던 것일까? 박근혜 정부 시절 위안부 문제의 해결 방식은 미국의 압력의 결과라는 것은 거의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윤석렬 정부의 강제징용 문제의 해결도 그러했을까?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윤석렬은 3.1절 기념사를 통해 망국의 책임이 우리 민족이 세계사의 흐름을 주체적으로 타지 못했던 것에 있다고 분명히 못 박았다. 그리고 이제 일본은 우리와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라고 단언했다. 또한 방일 전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인상은 일본은 아름다운 나라이며 선진국이라는 것이었다고 토로함으로써 일본인들의 호감을 샀다. 어디 그뿐인가? 윤석열이 일본 젊은이들과 만나고 싶다고 방문한 곳은 탈아론을 주창하면서 조선을 경멸했던 인물이 세운 게이오 대학이었고 거기서 행한 연설에서는 조선 침략을 정당화한 인물의 언명을 직접 인용했다. 이렇게 볼 때 윤석렬은 아베와 같은 일본 우익 정치인을 추종하고 있으며 일부 국내 연구자들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신봉하고 있다고 의심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베는 일찍이 인도태평양이라는 새로운 지정학적 개념을 천명하면서 미국을 뒷배로 그 지역에서 일본이 맹주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중국을 제치고 일본이 그 지역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것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군국주의자들의 망상을 미국의 구미에 맞게 포장해 부활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한국의 역할은 유사시 미국과 일본의 지휘를 받는 하부 첨병이다. 그런데 윤석렬 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의 안보 전략은 지금까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견지했던 전략적 모호성을 폐기하고 이러한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적으로 포섭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윤석렬은 미국과 일본의 인도태평양 전략 안에서 미일한 군사동맹으로 나가는 것이 세계사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편입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다. 또한 윤석렬은 인도태평양은 우리가 과거에 놓친 기회가 다시 찾아온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다. 윤석렬의 이러한 생각은 우리 안보에 커다란 위협요인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윤석렬 정부가 들어선 후 점점 강도를 높여 가는 한미 연합 훈련과 일본과의 지소미아 정상화는 이미 중국과 러시아를 자극하고 있다.

4. 우리 민주주의의 나아갈 방향
우리나라만큼 민주주의를 주체적으로 발전시킨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드물다. 전후 미국에 의해 강요된 민주주의 체제를 마지 못 해 받아들인 일본은 자민당이라는 우파 정치집단에 의한 일당 통치에 길들여져 있다. 미국이 민주주의와 비교를 해도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트럼프와 같이 안팍으로 철저하게 천박한 인물이 대통령이 될 조짐은 없다. 부패하고 무능한 인물들도 최소한의 품격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척은 했다. 그러나 윤석렬 정부가 들어서면서 시중에 회자되는 무속인 논란과 윤석렬 자신의 무분별한 언행 그리고 이제 떳떳하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일장기마저 들고나오는 비상식적 극우 집단의 언동은 우리 민주주의가 시험대에 올랐음을 말해 주는 징표가 아닌가 우려된다. 그러나 우리 시민사회의 주체적 자정능력은 이미 촛불 혁명에서 충분히 검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연대만이 그 자정능력의 마르지 않는 샘이다. 강고한 연대가 조직화되고 지속적으로 충원된다면 동학혁명 이래 우리의 역사적 사회적 디엔에이로 굳어진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은 우리 민주주의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윤석렬 정부의 어깃장은 일회성 일탈로 끝날 것이다. 문제는 연대의 대오를 유지할 수 있는 끊임없는 충원이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경쟁에서 이겨야만 한다는 훈련을 받은 세대들이, ‘영끌과 코인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생각하는 세대들이, 공동선과 공공의 복지를 위해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면서 서로 돌보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에서 우러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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