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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위 역사기행] 한양도성 제1 백악구간 답사를 마치며

  • 202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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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제1 백악구간 답사를 마치며
-충북참여연대 문화위원장 전금희-
 
*충북참여연대 문화위원회는 올해 한양도성을 총 6차례에 거쳐 역사기행을 진행합니다. 매달 진행되는 한양도성 기행 후기를 연재합니다. 
매달 셋째주 토요일 진행되니 관심있으신 회원님들의 참여 부탁 드립니다. 

  내공을 쌓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중 하나가 여행인데 독서가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면 여행은 다니면서 하는 독서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 답사는 현장을 다니면서 역사 공부와 함께 운동 효과까지 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내공 쌓기가 어딨으랴. 특히 이번 한양도성 제1 백악구간은 가파른 계단에 체력과 인내심까지도 요구했다. 평상시 운동량이 부족했던 이들은 잘 오를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에 자신의 건강을 점검해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으리라. 버스에 올라 맛있는 떡과 과일을 먹으며 쭉쭉 뚫린 버스 전용차선처럼 오늘의 답사가 순조롭기를 바란다.

 백악구간은 창의문에서 출발하기로 하였다. 혜화문까지의 거리는 약 4.7km로 창의문은 개경의 자하동과 주변의 절경이 비슷하여 ‘자하문’이라고도 불린다. 한양도성의 사소문(四小門) 중 유일하게 조선 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고, 인조반정 때엔 이 문을 통하여 서인들이 궁궐로 침입했다고 하는 강태재 고문님의 말씀에 역사적 가치가 가장 높은 한양도성의 문에서 우리는 이원식 처장님이 만들어주신 현수막을 펼치고 답사 기념사진을 찍었다. 참담한 결과를 가져온 인조반정으로 물러나 전쟁을 다시 겪는 세상을 보는 광해군의 심정은 어땠을까? 지정학적으로 늘 불안한 위치에 있는 우리나라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것은 몰라도 외교정책에서만큼은 광해군과 같은 중립외교정책을 펼치는 지도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창의문에서 백악마루로 오르는 성벽은 무척이나 가파르다. 회원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져 올 때마다 괜히 미안했다. 혜화문에서 출발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내리막 계단에 약한 내 입장이 약간은 개입되었으니 말이다. “쉼터가 있는 곳마다 쉬도록 할게요.” 하며 오늘의 답사는 계획한 코스의 완성보다 회원들의 안전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조금씩 높이를 더할 때마다 성벽의 모습은 마치 용이 꿈틀대는 형상과 같았고, 성 밖의 서울 풍경은 하나둘씩 회원들의 시각에 매료되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나서야 조금은 안심이 되는 자신을 보니 답사를 주관하는 이는 항상 회원들의 의견에 우선점을 두어야 하는구나 싶었다. 

 드디어 한양도성 전체 구간 중 가장 높고 경관이 뛰어나다는 백악마루(342m)에 도착했다. 이제야 한숨을 돌린다. ‘힘든 코스는 이제 벗어났구나’ 하는 안도감과 정상에 올랐다는 자부심에 경관을 감상하기보다는 인증샷을 남기기에 더 바빴다. 무심코 내려오면서 63빌딩도 한번 찾아볼 여유 없이 정상에서 돌아선 것이 못내 아쉽다.

 성벽에 글자를 새겨넣은 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이 돌에는 축성 때 책임기술자와 감독관의 이름을 새겨넣어 책임시공을 하도록 하였다. 당시에도 책임제가 있었다니, 옛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한다. 아, 사람은 갔어도 이름 석 자는 여기에 남는구나.

 청운대로 향하는 길에 1·21 사태(김신조 사건) 소나무를 만났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침투한 북한의 특수부대원들과 우리 군경이 교전한 흔적이다.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그날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준다. 그 충격으로 이 구간은 개통이 되지 않다가 40년이 지난 2007년에서야 개통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개통식에 참여한 장성림 선생님은 그날의 추억에 젖고, 송재봉 대표님은 청와대 행정관 시절, 평창동에서의 삶과 근처 소나무 숲길을 거닐던 추억에 젖는다. 나도 언젠가는 이 길을 다시 걸으며 좋은 추억에 젖어보고 싶다.

 시대별로 쌓은 성벽의 돌 모양이 각각 달랐다. 태조 때는 아랫돌의 모양이 크고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고, 세종 때엔 모가 난 자연석을 부드럽게 다듬어 쌓았다. 숙종 때에는 위아래의 돌 길이가 같아져서 순조 때에는 가로세로의 길이가 거의 정사각에 가까워졌다. 나중엔 성벽의 모양만 보아도 어느 시대에 쌓은 것인지 한눈에 알 수 있어 조금은 안다는 기쁨에 흐뭇했다. 

 다음은 곡성에 다다랐다. 곡성(曲城)은 도성의 산세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여기는 주요 지점이나 시설을 효과적으로 감시하고 방어하기 위해 성벽의 일부분을 둥글게 돌출시킨 곳인데, 수원화성 답사 때 보았던 사각 형태의 치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인근의 성곽 바깥으로는 조선 시대 도성을 순찰하던 군사들의 순성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한양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에 다다랐다. 정숙의 의미를 담아 숙청문(肅淸門)이 숙정문(肅靖門)이 되었단다. 현존 도성의 문 중 유일하게 좌우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대문이라 여기에서 또 단체 기념사진을 남겼다. 일정이 바쁜 관계로 우리는 혜화문은 뒤로 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러 점심을 향했다. 오랜만에 먹는 수제 냉모밀 돈가스와 생선가스는 단번에 간식으로는 부족했던 당 보충과 지방의 섭취로 든든함을 주었다. 

 식사 후, 종묘로 향했다. 종묘안내는 김출배 해설사님이 친절하고 상세하게 알려주셨다. 연지를 지나고 망묘루를 지나 신당으로 향했다. 신당의 신주는 단 하나밖에 없어 복제가 안 된단다. 따라서 선조와 인조는 전쟁 중에도 신주는 꼭 모시고 갔다고...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는 말은 그러한 뜻에서 나온 말인가 보다.
 
 신주를 모시고 선왕들의 덕과 공을 제사 지내는 일은 매우 복잡하고 번거롭게 느껴졌다. 대사 중사 소사, 정규제, 임시제 등 년 중 제사도 많거니와 한번 제를 지낼 때마다 약 400~ 500명의 남자가 동원된다고 한다. 조선 시대는 종묘에 여자들의 출입이 통제되어 들어올 수 없었다는데, 우리는 시대를 잘 타고나서 들어오게 되었다는 해설사님의 말씀에 웃어본다. '제사의 시작은 축시 1각(1시 15분)에 시작하여 동틀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영녕전으로 가지 않은 신주만 해도 19실의 왕에 그 부인들의 제사까지 지냈어야 했으니 얼마나 지루하고 힘들었을까. 한겨울엔 또 어떻게 제사를 지냈는지는 감히 상상도 하기 싫다. 제사는 주로 왕권 강화가 필요한 왕들에게서 더욱 잦았다는데 그 모든 제사와 절차가 왕의 정통성 확보 때문이었다니, 에고! 그깟 왕이 뭔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조선 시대엔 참으로 쓸데없는 형식에 에너지를 많이도 썼다 싶다. 그 결과로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현실에 오늘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말이다. 

 공사로 인해 왕과 왕비가 모셔진 종묘의 본래 형태를 볼 수 없는 것과 1구간 마지막 관문인 혜화문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이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오늘 답사는 일단 한양도성에서 가장 힘들다는 백악구간을 무사히 마쳤다는 데에 의미를 둔다. 자신의 싸움에서 모두 이겨냈다는 성취감과 아직은 몹쓸 체력이 아닌 안도감에 모두가 웃는 모습을 보니 준비하느라 나름 애쓴 보람이 있다. 새롭게 안 사실에 지적인 욕구도 어느 정도 채워진 기분이다. 이런 만족감이 다음 답사에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며 그동안 건강한 체력을 좀 더 비축해 놓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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