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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제2구간 낙산구간+덕수궁 답사를 마치며

  • 202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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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충북참여연대 문화위 역사기행
한양도성 제2구간 낙산구간과 덕수궁 답사를 마치며
-충북참여연대 문화위원회장 전금희-
*충북참여연대 문화위원회는 올해 한양도성을 총 6차례와 심산유곡 암자 기행을 2차례 진행합니다.
매달 진행되는 한양도성 기행과 암자순례 후기를 연재합니다.
매달 셋째주 토요일 진행되니 관심있으신 회원님들의 참여 부탁 드립니다.
 
퇴원을 하자마자 곧바로 답사일이 다가왔다. '무리하다 혹시라도 더 심해지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답사를 만류하는 남편을 뒤로하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걷는 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한양도성 두번째 길을 나섰다. 책임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안 가면 나중에 꼭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은 마음이 더 컸기에...
성북동의 '최순우 옛집'을 최대한 근거리에 세워준다고 기사님이 들어간 골목은 승용차 한대만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이었다.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집에서어떻게들 살아갈까? 하지만 골목 곳곳에서 키우는 소담하고 예쁜 꽃들을 보니 또 힐링이 된다.
최순우선생은 국립박물관장이자 미술사학자로서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획을 그으신 분이다. 그분이 가시기전 8년간 살았던 옛집은 ''자 형태라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집필공간의 사랑방 남쪽으로는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문을 닫으면 이곳이 곧 깊은 산중이다)과 북쪽으로는 '오수당(낮잠자는 방)'의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이 특이했다. 자 모양의 창문은 직접 가꾸신 앞뒤뜰의 정원들과 잘 어우러져 고풍스런 미를 더한다. 따님이 기거했던 건넌방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란다. 고결함과 기품, 결백을 뜻하는 '梅心舍(매화 마음을 가진 방)'이다. 선생의 뜻이 오롯이 따님에 대한 사랑으로 전해지는 현판의 글씨답다. 연립주택의 바람으로 자칫 헐릴 뻔한 위기에 처했던 선생의 한옥을 내셔널트러스트에 의해 시민의 힘으로 지켜내어 현재는 시민문화유산 1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앞마당의 앙증맞은 연못과 백년이 지난 훤칠한 향나무는 선생의 소박한 삶과 기백을 동시에 보여주는 듯하다. 툇마루의 커다란 통나무로 만든 함지박도 옛추억을 부르는 정겨움을 갖췄다.
빗살무늬토기를 통해 '우리나라 역사는 5천년 전이다' 라는 이론을 정립시키고, 강화도의 고려청자 가마터를 찾느라 애쓰셨던 최순우(본명 최희순) 선생, 스승인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 아들의 이름과 같은 돌림자 ''을 따서 '순우'라 이름지어 주셨단다. 제자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컸으면 아들과 같은 돌림자로 이름을 지으셨을까? '내 외아들 사랑하듯 대하라'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스승은 고스란히 제자에게 실천하고 계셨던 것이다.
경신중고교 담장을 따라 혜화문을 향했다. 걷다보니 조선시대 성벽의 소중한 문화재가 학교 담장으로도 쓰이고, 빌라의 한쪽 벽으로도, 어느 주택의 담장으로도 쓰였다. 문화재의 소중한 가치에 아둔했던 시절의 결과물이다. 앞으론 역사에 무지하고 문화재에 무지하여 이런 일이 제발좀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벽만 보아도 이젠 어느 시대 어느 왕의 시절에 쌓은 성벽인지 한눈에 알 수 있으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한다.
성북동에 왔으니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를 빼놓을 수 없다는 고문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바람이 서늘한 나무 그늘 아래에 쭈욱 펼치고 앉아 시낭송을 들었다. 여정님의 분위기 있는 목소리가 좋은지, 때마침 하얀 비둘기 한마리가 여정님 옆으로 점점 다가온다.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해서 카메라 셔터는 바빴다. 정희 친구는 '저녁에'라는 노랫말 시를 낭송했다. 유심초가 노래로 부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가 흥얼흥얼 입밖으로 나온다.
'저렇게 많은 별들중에 별하나가 나를 바라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중에 그별 하나를 바라본다...'
'그렇게 우리는 수많은 별들 중에 하나가 되었다가 또 언젠가는 잊혀져가겠지? 그때까지 시의 노랫말처럼 정답게들 살다 가자' 생각하며 한양도성 박물관에 이르렀다. 입구의 노란 금계국이 두팔벌려 환영한다. 박물관엔 성의 둘레길 안내와 성의 축조 과정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해놓았다. 성 축성 당시 인부들의 고충이 오롯이 느껴졌다. 그 무거운 돌들을 날마다 쪼개고 들고 나르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일하다가 도망치고 죽기도 참 많았던 모양이다. 그 시대에 성을 쌓는 인부로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요즘말로 공사실명제를 뜻하는 '각자성석'의 이미지 속엔 누군가가 '참여연대'라는 글귀를 새겨넣었다. 그 글귀가 새삼 의미있게 다가왔다. 오늘은 우리가 여기에 흔적을 남기고 간다고~
점심을 먹고 덕수궁(경운궁)으로 발길을 옮겼다. 원래 정문은 남쪽의 인화문이었으나 지금은 동쪽의 대한문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열정이 가득한 해설사님을 따라 덕수궁의 역사에 대해 속속들이 귀담아 들을 수 있었다.
중도를 중시하는 중화전의 앞뜰엔 조회 등의의식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어느쪽일까? 무관보다는 문관?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이자 1919년에 승하할 때까지 계셨던 곳이라 일월오봉도가 중앙에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서 생활하며 늦둥이로 낳은 덕혜옹주의 커가는 모습을 꿀떨어지는 눈으로 지켜보는 고종의 이미지를 상상해본다.
드라마에서 엄상궁으로 불리던 순헌황귀비가 살았던 즉조당을 거쳐 석어당을 들렀다. 석어당은 선조가 임왜 중 피난갔다 환도한 후 거처한 장소다, 또한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시킨 장소이기도 하고 인조반정 성공 후엔 다시 인목왕후에 의해 광해군의 죄를 문책당한 곳이기도 하다는 말씀에 만감이 교차했다. 지금 시절엔 광해군같은 지도자가 절실한데...
유현문은 고종이 덕혜옹주를 위해 지었다는 유치원을 옹주가 가마타고 드나들던 문이다. '유일하게 현명한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니 꼭 한번씩 통과해 보고 가면 좋다기에 나도 통과요~
정관헌은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다.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전각인데 서양식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박쥐 등의 그림이 조각되어 있다. 혐오스런 박쥐가 중심에 있는 것이 의아했는데 다산을 상징하는 동물이라서 그렇다네요.
우리의 문화재는 대부분 목재건물이라 아름답긴 해도 화재에 취약한 것이 흠이다. 지금 덕수궁 내의 건물도 대부분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새로 지어진 건물이다.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집무실과 외국사신들의 접견실로 사용할 목적에 지었는데 화재방지를 위해 돌을 이용했다. 서양식 건물이라 덕수궁 내의 다른 건물들과는 많이 대조된다. 박물관이나 다른 용도로도 쓰였다가 현재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쓰인다. 대한제국역사에 관한 영상보기 예매가 다들 안 돼서 아쉬워했는데, 그것까지 봤다가는 일정 초과로 이어졌을 것이기에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했다.
전기나 전차도 도입할 줄 아는 고종은 생각보다는 그렇게 무능한 왕은 아니었다고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말을 반복하며 강조하시는 해설사님은 현시대의 리더가 역사인식에 미흡한 자세로 외교에 임하는 것을 몹시도 안타까워 하였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경청하는 우리팀의 답사자세에 감동했다며 연신 고맙다신다. 우리도 그런 뚜렷한 역사인식과 열정을 가진 해설사님이 너무나 감사했다. 덕혜옹주가 드나들었다는 유현문을 우리 국민 모두가 통과하여 현명한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과거를 잊지 않는 현명한 지도자를 제대로 뽑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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